“방송 지각 변동, 셋톱박스도 달라진다”
2015년 01월 26일 (월)
ⓒ 마이크로소프트웨어, 남혜현 기자
- 정기주 휴맥스 제품기획팀장
정기주 휴맥스 제품기획팀장(사진)도 올해 CES를 다녀왔다. 휴맥스 전시 부스가 차려진 건 아니다. 애초에 관람이 목적은 아니었다. 전시 소감을 묻자 손사래를 친다. 둘러볼 여유도 없이 현지 사업자와 잇단 미팅을 가졌다는 뜻이다. 휴맥스는 올해부터 북미 케이블 시장에서 성과를 내겠단 목표를 세웠다. 지난 2년간 북미 시장 조사와 선행 개발을 마치고 현지 5대 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MSO) 중 한 곳과 협력키로 한 결과물을 올해부터 내겠다는 것이다.
물론 휴맥스가 북미 시장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15년 전인 2천년 대 초반부터 현지 위성사업자와 협력관계를 가져왔다. 케이블 시장도 진출을 안했다 뿐이지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런 휴맥스가 왜 하필 지금 북미 케이블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는 걸까. 개발자 출신인 정 팀장은 휴맥스 R&D본부 기술 기획을 거쳐 현재 제품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방송 플랫폼의 기반 기술이 달라지고 있다. 북미 뿐만 아니라 세계 방송 산업이 겪는 변화다. 방송이 무선주파수(RF) 기반에서 인터넷프로토콜(IP)로 넘어가는 게 핵심이다. 지금까지 RF에서 사용하던 방송 규격 OCAP(Open Cable Application Platform)이 소용없어졌다. IP 기반의 새 플랫폼으로 변하는 이 때가 진출의 최적 시기라 봤다.”
OCAP은 개별 업체가 필요한 방송용 미들웨어를 직접 만들어 각자 사용하던 시절의 규격이다. 독자 구현한 미들웨어니까 사양도 공개하지 않았고, 다른 이가 가져다 쓸 수도 없는 ‘클로즈드(closed)’ 형태의 폐쇄형 플랫폼이다. 그런데 정 팀장은 지금 “미국 케이블 방송의 아젠다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닫힌 OCAP 대신 열린 플랫폼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가장 큰 케이블 MSO가 주도해서 오픈 플랫폼 사양을 만들고 있다. 미들웨어 자체를 구글 안드로이드와 같은 형태로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어느 한 회사가 플랫폼을 소유할 순 없게 된다. 플랫폼에 참여해 서비스나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구현하는 환경이 개방되면 방송 시장 역시 빠르고 크게 생태계가 넓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서비스가 추가되거나 발전하기 쉬어지지 않겠는가.”
오픈 플랫폼은 구글 안드로이드를 떠올리게 한다. 한 때 국내외 유수 하드웨어 업체가 스마트폰처럼 TV에도 안드로이드를 적용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휴맥스 역시 안드로이드를 미들웨어로 채택한 셋톱박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다만 최근 뉴스에선 스마트 TV와 안드로이드를 엮는 이야기는 잘 들려오지 않는다. 정 팀장에 따르면 셋톱박스 미들웨어는 방송가에서 논쟁거리다.
▲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휴맥스 본사. 사진=휴맥스 홈페이지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 생태계를 장악했다. 그러나 그건 안드로이드라는 소프트웨어의 승리다. 안드로이드 단말기 업체의 운명은 불분명하다. 모두 같은 소프트웨어를 쓰는 시장에서 하드웨어 업체의 경쟁력은 풍전등화다. 구글도 어느 한 하드웨어 업체가 아주 큰 힘을 갖길 바라지 않는다. 안드로이드의 승리는 구글의 것이지 단말기 회사의 것이 아니었다. 애플과 호각을 이루던 삼성전자의 분기 매출은 최근 하향세다. 물론 안드로이드 없었다면 지금의 삼성전자 IM 부서도 없었을테지만.
“셋톱박스의 미들웨어로 안드로이드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다. 구글도 안드로이드 TV를 만들었다. 이처럼 안드로이드가 하나의 선택이 될 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무엇이 정답이라고 단정짓긴 어렵다. 현재 OTT박스에는 안드로이드 적용이 활발한 반면, 유료방송용 셋톱박스에는 일부 사업자만 안드로이드를 채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드로이드가 오픈 소스 프로젝트(AOSP)로 소스를 공개했지만, 플랫폼 생태계의 주도권 확보를 두고 방송사업자와 구글 간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구글의 오픈 생태계 전략이 그 ‘공짜’의 마력 때문에 견제 상대가 됐다면, 애플은 특유의 폐쇄 정책 때문에 방송 사업자의 파트너가 되기 어렵다. 다만 정 팀장은 애플TV를 비롯해 로쿠, 구글 크롬캐스트, 아마존 파이어TV 같은 OTT 박스가 충분한 잠재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아직 셋톱박스의 주력 사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파괴적 혁신의 가능성을 갖고 있어 산업계가 모두 고민하고 있는 사업 모델이라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방송 사업자도 OTT 서비스를 경쟁자로만 보기 보단 기존 사업에 흡수하는 등 적극 수용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방송 서비스 외에 ‘VOD 서비스’처럼 OTT에서 제공하는 것과 유사한 모델을 같이 선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OTT의 대표급 서비스 ‘넷플릭스’와 손잡는 방송사도 생겨났다. 방송사가 자신의 서비스에 넷플릭스를 포함해 제공하는 대신 수익을 나누는 것이다.
■셋톱의 고민...“합치느냐, 독립하느냐”
미들웨어가 오픈 플랫폼으로 바뀌는 것 외에, 셋톱박스 자체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셋톱박스는 원래 유료 방송을 보기 위한 수신기로 시작했다. 지상파 위성을 일반 TV가 직접 수신하기 어려웠고, 또 유료 방송의 수신 제한을 콘트롤할 매개체가 필요해 만들어진 것이 셋톱박스다. 그런 셋톱박스가 지금은 스마트홈 시대 가정 내 중심 서버로 역할을 노리고 있다.
휴맥스도 ‘스마트홈’을 준비중이다. 미디어 서버와 게이트웨이(모뎀)의 역할을 셋톱박스 안에 집어 넣는 것이다. 방송과 통신의 영역을 모두 셋톱박스가 끌어안는 셈이다. IoT 스마트홈을 접목할 수 있는 방안을 셋톱박스 영역에서도 구체적인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 간 멀티스크린이 셋톱 박스 진영에서 화두였어요. 셋톱이 TV라는 단말기 하나에만 붙어서 수신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안의 PC와 노트북, 심지어 스마트폰 등 여러 스크린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미디어 서버로서 역할로 진화하고 있는 거죠.”
▲ 정기주 팀장은 휴맥스가 미디어 서버와 게이트웨이 역할을 한 셋톱박스 안에 집어 넣는 댁 내 미디어 서버를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방송이나 통신사업자는 케이블이나 IPTV를 통해 스마트홈 서비스를 제공, 가입자당매출(ARPU)을 높이는 전략을 꾀하고 있다. 앞으로는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도 유사한 서비스를 선보일 수도 있다. 정 팀장은 “휴맥스가 직접 스마트홈 서비스를 한다기 보다,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어떤 기술이나 제품이 필요한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멀티스크린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면서, 셋톱의 통신 기술 역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와이파이(WiFi)를 비롯해 무선 네트워킹 기술들이 빠르게 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가정 내 셋톱박스 한 대에 모든 기능을 다 집어 넣는 형태로 발전했다면 지금은 셋톱도 기기별로 중앙과 주변의 역할을 나눈다. 예컨대 한 집에 서너대의 TV가 있다면 방송 수신은 튜너를 가진 중앙 셋톱(서버)이 하고, IP만 가진 다른 셋톱은 네트워크를 통해 수신된 방송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클라우드도 마찬가지다. 셋톱이 별도 하드디스크를 갖고 방송을 녹화할 필요 없이, 클라우드 스토리지에 저장을 했다가 사용자가 콘텐츠를 불러와 보는 형태도 가능하다.
다만, 최근 북미 시장 방송 업계에선 셋톱박스에 ‘통신’과 ‘방송’의 역할을 모두 집어 넣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분위기가 읽히는 것 같다는 게 정 팀장의 의견이다. 통신기술과 방송기술 진화 속도 차이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인다. 방송기기인 셋톱에 인터넷 모뎀을 결합해 홈게이트웨이 서버로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 기류였다면, 최근엔 각 기술의 특성을 살려 따로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스마트TV 때문에 셋톱이 없어진다?
스마트TV가 대중화되면 셋톱박스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질 거란 이야기도 있다. 정 팀장은 “근본적으로 IP기반의 방송환경으로 바뀌면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가능한 것’과 ‘꼭 벌어질 일’은 다른 문제다. 셋톱 시장이 한 순간에 완제품 TV로 통합될 것인가에 대해선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IP 기반으로 간다고 해도 당장 TV에 들어가기 어려운 기능이 있다. 예컨대 기존 RF 기반 유료방송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건 TV가 수신하기 힘들다. 또 최근 셋톱에 요구되고 있는 미디어 서버로서 기능 역시 TV에 모두 넣긴 어렵다. TV에 하드디스크를 넣고, 모든 복잡한 기능을 적용하면 단가가 올라간다. 모든 소비자가 고가 스마트TV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통신사나 케이블마다 지원하는 유료방송 패키지가 다른데, 완제품TV에서 이를 모두 소화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제약도 있다. 완제품TV와 통신, 방송 기술의 진화속도가 다르다는 점도 셋톱박스의 생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TV는 고가 가전인 만큼 한 번 사면 10년 씩 사용한다. 그러나 지금의 통신 기술 발달 속도는 그 보다 현저히 빠르다.
완제품TV만 스마트하게 진화하는 것도 아니다. 셋톱도 역시 계속해 변화하고 있다. 특히 최근 IP기반으로 방송 변화를 신속하게 받아들이면서 바뀌는 가치 사슬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과거에는 지적재산권, 독점 기술을 토대로 한 산업에서 상용 미들웨어를 가진 회사가 가치를 가졌다. 그런데 IP는 오픈소스에 기반한다. 공개된 기술이니까 특허도 없다. 기존과는 다른 가치가 생겨나기 시작한거다. 지금은 그 가치가 애플리케이션이나 서비스 혁신으로 가는 것 같다.”
▲ 출처=휴맥스 홈페이지
휴맥스가 다음 단계 먹거리로 생각하는 오픈 플랫폼 탑재 셋톱박스 역시 이같은 가치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플랫폼은 기반일 뿐이고, 이 위에서 어떤 앱이나 서비스를 올리는 지에 따라 생사가 갈릴 수 있다. 스마트폰도 제품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단말기일 뿐이다. 그 위에 새로운 기능을 주는 앱이 올라가 가치를 평가 받을 때 스마트폰의 진가가 살아난다. 셋톱박스도 마찬가지다. 단말기에서 앱이나 서비스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셋톱 사양을 잘 이해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조립 능력을 더 높게 친다. 개별 기술은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다. 인터넷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 놓고 있어서 새로 만들어서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다. 이미 조각조각 나와 있는 것 중 필요한 걸 모아 하나의 완결된 형태의 시스템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게 가치가 되는 거다.”
네트워크 거인 시스코가 셋톱박스 업체를 인수하고 세계 셋톱 시장에 플랫폼을 제공하던 회사를 인수했다. 시스코를 비롯해 기존 셋톱 제조 강자의 역할이 달라지고 있는 것, 현실을 직시하고 바뀌는 시장에 맞춰 헤쳐모이고 있는 것, 그게 지금의 방송 시장이다. 정기주 팀장은 지난 몇 년 간 북미 시장에서 그런 흐름을 봤다. 휴맥스가 준비하는 것도 바로 이 변화하는 시장에서의 생존과 선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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